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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일을 당하고 법에 기댔을 때, 법이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다음엔 어디에 기대야 할까요. 20억 투자금 중 절반을 날리고도 10년 가까이 재판을 이어갔던 정희 씨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 저는 오래전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났습니다. 시스템을 믿었다가 시스템에 배신당한 사람들이 결국 어떻게 살아남는지, 그 이야기를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투자 사기와 횡령 피해, 법이 정말 약자를 지켜줄 수 있을까요
정희 씨가 투자금을 잃게 된 경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상대방의 제안으로 대표이사 직함을 일시적으로 넘겨줬는데, 그 틈을 노린 상대가 허위 서류를 꾸며 회사 자금을 빼돌렸습니다. 결국 20억 상당의 투자금 중 절반, 약 10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대표이사 직함 양도"라는 행위가 왜 그토록 치명적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인 등기부등본에 기재된 대표이사는 회사의 모든 법률 행위를 대표하는 권한을 갖습니다. 쉽게 말해 도장 하나로 회사의 자산을 움직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뢰를 전제로 한 구두 합의가 법정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저도 아버지의 사례를 통해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공장 납품 사업을 하시던 중 원청 담당자가 요구하는 뇌물, 즉 리베이트(rebate)를 거절하셨습니다. 리베이트란 거래 과정에서 수수료나 사례금 명목으로 몰래 건네는 금품을 뜻하는데, 이를 거절한 대가로 아버지는 일감을 모두 잃으셨습니다. 억울했지만 증거가 없었고, 법에 호소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정희 씨가 10년 가까이 재판을 이어갔지만 기대와 다른 판결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저는 그 심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갔습니다.
횡령(embezzlement)이란 자신이 관리하는 타인의 재물을 불법으로 자기 것으로 삼는 범죄를 말합니다. 정희 씨의 경우처럼 대표이사 직함을 이용해 허위 서류를 꾸민 뒤 자금을 빼돌리면, 피해자가 증거를 모아 고소해도 민사와 형사 모두에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실제로 한국 법원의 경제 범죄 관련 평균 재판 기간은 1심 기준으로도 수개월에서 수년에 이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출처: 대법원 사법연감).
법이 느리게 움직이는 동안 피해자의 삶은 멈추지 않습니다. 남편의 당뇨 합병증, 세 아이의 학업, 생활비. 정희 씨는 결국 긴 법정 싸움을 포기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드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 선택이 패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택하는 것도 용기라는 게, 아버지를 보며 배운 것 중 하나였으니까요.
- 대표이사 직함 양도는 회사 전체의 법률 행위 권한을 넘기는 것과 같습니다
- 횡령 피해는 형사 고소 후에도 재판이 수년씩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 리베이트 요구 거절처럼 '옳은 선택'이 오히려 피해로 돌아오는 구조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 법적 싸움을 포기하는 결단이 때로는 가족을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생계 아르바이트와 훈제 오리 사업, 그래도 버틴 이유
삼겹살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손님이 먹다 남긴 고기를 보고 아이들 생각에 눈물을 삼켰다는 정희 씨의 이야기, 이 한 장면이 저에게는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분식집에서 뜨거운 그릇에 손을 데도 고통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는 부분도요.
저도 비슷한 감각을 기억합니다. 아버지가 사업 부도 이후 경비원과 막노동을 전전하시던 시절, 집에 돌아오셔서 아무 말씀도 없이 그냥 주무시러 가시던 뒷모습이 있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오히려 말문을 막아버리는 것, 그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지금은 압니다.
정희 씨는 생계형 창업(subsistence startup)으로 훈제 오리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생계형 창업이란 생존을 목적으로 시작하는 소규모 자영업을 의미하는데, 창업 동기가 성장보다는 당장의 수입 확보에 있어 실패 시 리스크가 개인에게 고스란히 집중됩니다. 실제로 중소벤처기업부 통계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5년 생존율은 30% 안팎에 불과합니다(출처: 중소벤처기업부).
정희 씨의 훈제 오리 사업은 오리의 색깔 문제로 판매 부진을 겪었습니다. 낮에는 오리를 굽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중고가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주 수입원이 자리를 잡지 못할 때 부업(side job)을 병행하는 구조, 쉽게 말해 두 개의 일을 동시에 굴리는 방식은 체력과 정신 모두를 극한까지 소진시킵니다. 제 경험상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무너지는 건 의지가 아니라 몸입니다.
그런데도 정희 씨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들에게 기죽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지점이 저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강해서 버틴 게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버틴 것. 아버지도 그러셨을 겁니다. 빚을 다 갚으시던 날 처음으로 치킨 상자를 들고 오시면서 "미안하다, 오늘은 기분 좋으니 같이 먹자"고 하셨을 때, 저는 그 웃음이 얼마나 비싼 웃음인지 알았습니다.
결국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딸을 통해 방송국의 연락을 받게 된 정희 씨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마련됩니다. 반전이라고 부르기엔 여전히 고단한 길이겠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가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경우는 분명히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대표이사 직함을 잠깐 빌려줬는데도 횡령 피해를 입을 수 있나요?
A. 충분히 가능합니다. 등기부등본에 대표이사로 기재되면 법적으로 모든 회사 거래를 대표할 권한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구두 합의나 내부 약속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받기 어렵고, 그 사이 상대가 허위 서류를 만들어 자금을 빼돌리면 피해 복구가 매우 어려워집니다. 직함 하나를 넘기는 일이 실제로 얼마나 큰 위험인지, 정희 씨의 사례가 잘 보여줍니다.
Q. 횡령 고소 후 재판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요?
A. 경제 범죄는 피해 금액과 관련 서류, 계좌 추적 등 입증 과정이 복잡합니다. 검찰 수사, 기소, 1심·2심·3심 진행까지 합치면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흔하고, 그 사이 피해자의 생활은 멈추지 않습니다. 정희 씨가 약 10년을 재판에 쏟았다는 사실이 예외적인 경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복잡한 민형사 사건은 이 정도 기간이 드물지 않습니다.
Q. 극한 상황에서도 버티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을까요?
A. 제가 아버지를 보며 느낀 건, 강한 의지보다 '보여주고 싶은 대상'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희 씨도 아이들, 아버지도 가족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의미 중심 대처(meaning-focused coping)라고 부르는데, 고통 자체를 없애는 게 아니라 고통에도 버텨야 할 이유를 찾는 방식으로 극한 상황을 견디는 기제입니다.
결론
정희 씨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저는 계속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뇌물을 거절했다가 일감을 모두 잃고, 사장님에서 경비원으로, 막노동으로 전전하시던 그 시간들. 억울함을 증명할 방법도 없이 그냥 묵묵히 걸어가셨던 뒷모습이요.
시스템이 정의를 보장해 줄 거라는 믿음은 때로 가장 빠르게 깨집니다. 그렇다고 버티는 걸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정희 씨도, 저희 아버지도 그렇게 하루를 쌓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남몰래 눈물 삼키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분들께, 저는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그 걸음이 헛되지 않다는 걸, 결국은 증명하게 되더라는 걸 믿습니다.
참고 : "상위 5%에서 바닥까지", 모진 시련 속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
https://www.youtube.com/watch?v=ynZrFUywPL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