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회 초년생 시절, 거래처 부장이 술기운에 상사를 향해 불쾌한 말을 늘어놓던 그 회식 자리가 지금도 떠오릅니다. 저는 참지 못하고 "너무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고, 결국 그 거래처와의 관계는 끊겼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했으니 후련하긴 했는데, 그 후련함이 꽤 오래 씁쓸하게 남았습니다. 그때부터 줄곧 품어온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과 관계를 지키는 것, 이 둘은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걸까요.



감정을 담는 그릇, 컨테인먼트란 무엇인가

정신분석학자 윌프레드 비온은 인간의 마음에 감정을 담는 내면의 그릇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컨테인먼트(Containment)'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컨테인먼트란 감정을 억누르거나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요동치는 감정을 내면에서 충분히 소화하고 정제한 뒤 성숙한 반응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감정을 엄마에게 쏟아내면, 엄마가 그것을 받아 소화하고 다시 아이가 다룰 수 있는 형태로 돌려주는 과정을 그는 원형으로 봤습니다.

비온의 이론에 따르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이 컨테인먼트를 스스로 수행할 수 있게 됨을 뜻합니다. 그릇이 크다는 건 단순히 화를 참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밀려올 때 그것을 관찰하는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처음엔 상사 앞에서 참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보며 그냥 성격이 급한 탓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을 담아낼 내면의 공간이 부족했던 문제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반응의 차이를 성향이나 기질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그 상황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반응을 결정하는 더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저는 그 부장의 말을 '나의 편을 무시하는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그 프레임 자체가 감정을 폭발시켰습니다. 만약 같은 상황을 '술자리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실수'로 읽었다면, 저의 그릇은 그 순간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 컨테인먼트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화하는 내면 역량이다
  • 그릇의 크기는 감정의 유무가 아닌, 감정을 얼마나 깊이 담아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 반응 방식의 차이는 성격보다 상황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요약: 비온의 컨테인먼트 이론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소화하는 능력이며, 그릇의 크기는 성격이 아닌 관점에서 결정된다.

 

관점 전환이 그릇의 크기를 바꾼다

하버드대학교 로버트 키건 교수는 심리적 성숙을 연구하며 그릇이 작은 상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욕망에 매몰되어 세상을 자신만의 필터로 해석하고, 다른 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상태. 반대로 성숙한 단계에서는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동시에 볼 수 있고, 그 모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갖게 된다고 키건은 설명합니다(출처: Harvard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그 거래처 회식 자리를 다시 떠올려 보면, 저는 분명히 키건이 말한 '자신만의 필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부장의 말이 상사를 향한 것임에도, 저는 그것을 저 자신에 대한 모욕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관점이 좁으면 타인의 행동이 전부 나를 향한 신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게 흑백논리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나는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한 데에는 그 사람 나름의 맥락이 있고, 그 맥락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그릇을 넓히는 훈련이 됩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이 옳다는 주장을 잠시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것과 관점을 내려놓는 것이 충돌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관점을 넓히는 것이 자신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관점 바깥을 바라보는 능력을 '탈중심화(Decentering)'라고 부릅니다. 탈중심화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유일한 현실로 보지 않고, 하나의 관점으로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인지 능력입니다. 탈중심화가 훈련된 사람은 감정에 휩쓸리는 대신 감정을 관찰하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고, 그 위치가 바로 그릇이 넓어지는 자리입니다.

요약: 키건의 연구와 탈중심화 개념이 보여주듯, 관점을 넓히는 훈련이 곧 마음의 그릇을 키우는 핵심 경로다.

 

홀딩의 힘, 관계 안에서 그릇을 완성하는 법

영국의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은 '홀딩(Holding)'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홀딩이란 상대방의 혼란이나 감정을 즉각 해결하거나 고쳐주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판단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좋은 양육자의 조건으로 출발한 개념이지만, 어른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출처: Freud Museum London).

제가 그 회식 자리에서 퉁명스럽게 내뱉은 한마디는 어떤 의미에서 홀딩의 정반대였습니다. 저는 불편한 감정을 담아두지 못하고 즉각 해소하려 했고, 그 순간의 후련함을 택한 대신 관계를 잃었습니다. 그릇이 넓은 사람은 불편한 감정이 밀려와도 그것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압니다. 그 기다림이 바로 위니캇이 강조한 홀딩의 힘입니다.

자기 심리학의 창시자 하인츠 코헛은 타인의 심리적 성장을 돕는 존재를 '자기 대상(Self-object)'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대상이란 상대방에게 따뜻한 거울이 되어 주는 존재, 즉 상대의 감정을 판단 없이 비춰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코헛의 통찰은 이렇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거울이 되어줄 때, 상대방뿐 아니라 나 자신의 그릇도 함께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 그릇은 혼자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말한 '공동체 감각', 즉 내가 더 큰 전체의 일부라는 느낌이 심리적 건강의 뿌리라는 통찰도 여기서 연결됩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거래처와의 관계가 끊어진 뒤, 저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리화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황을 담아낼 그릇이 저에게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 그릇은 관계를 통해서만 천천히 넓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요약: 위니캇의 홀딩과 코헛의 자기 대상 개념이 보여주듯, 그릇의 완성은 혼자가 아닌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며 판단 없이 기다리는 능력이 핵심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마음의 그릇이 작다는 게 성격 탓인가요, 아니면 바꿀 수 있는 건가요?

A. 심리학에서는 그릇의 크기를 고정된 성격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역량으로 봅니다. 로버트 키건의 성인 발달 이론에 따르면, 성숙도는 나이와 무관하게 관점을 넓히는 경험을 통해 단계적으로 성장합니다. 타고난 기질보다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해석하느냐가 반응 방식을 더 크게 결정합니다.

 

Q. 참는 것과 그릇이 넓은 것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단순히 참는 것은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고, 그릇이 넓다는 것은 감정을 내면에서 충분히 소화한 뒤 성숙한 반응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입니다. 비온의 컨테인먼트 개념이 정확히 이 차이를 설명합니다.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더 큰 폭발로 이어지지만, 소화된 감정은 관계를 오히려 깊게 만드는 자원이 됩니다.

 

Q. 직장이나 거래처처럼 이해관계가 있는 관계에서도 그릇을 넓히는 게 가능한가요?

A. 오히려 이해관계가 있는 관계일수록 관점 전환의 효과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나를 향한 신호가 아닌 그 사람 나름의 맥락이 있다고 보는 시각만으로도 즉각 반응을 줄이고 선택지를 넓힐 수 있습니다. 물론 경계선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 경계는 감정이 아닌 판단에서 나올 때 훨씬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Q. 홀딩을 실천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위니캇의 홀딩은 거창한 기술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힘들어할 때 즉시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조언하는 대신,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처럼 판단 없이 감정을 먼저 받아주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침묵도 홀딩의 중요한 형태입니다. 제 경험상 이 '기다리는 능력'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 몸에 배면 관계의 질이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결론

그 회식 자리를 돌아보면 지금도 복잡합니다.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말이 담겨야 했을 그릇이 저에게 없었습니다. 마음의 그릇은 비온의 컨테인먼트, 키건의 관점 전환, 위니캇의 홀딩이 각각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지만 결국 하나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감정을 소화하고, 관점을 넓히고, 관계 안에서 기다리는 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릇을 키우는 것은 자신을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더 단단해지는 과정입니다. 작은 자극에도 금이 가는 찻잔 같은 상태에서, 탁한 물도 가라앉힐 수 있는 깊은 호수로 나아가는 것. 그 첫걸음은 지금 불편한 감정이 들 때, 반응하기 전에 딱 한 박자만 멈추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g2m-kHUPjeM

         늘 상처받거나 화가 나시나요? 심리학을 통해 내면의 역량을 키우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