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감정이 없는 사람과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저는 학창 시절 '돌부처'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를 보면서 처음에는 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친구야말로 후자였다는 걸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의 진짜 비밀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안으로 향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기준이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
"저 사람은 원래 성격이 좋아서 저런 거야"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 설명이 너무 편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수십 년을 지켜본 그 친구는 원래부터 평온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외부의 자극이 들어와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 판단과 연결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황당할 만큼 어려운 숙제를 내주시던 날이 있었습니다. 다들 "너무한다"며 불평을 쏟아낼 때, 그 친구는 조용히 노트를 펼치고 과제 내용을 받아 적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어김없이 완성된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그냥 성실함이라고 봤는데, 이제 돌아보면 그건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적 동기(Intrinsic Motivation)가 작동한 결과였습니다. 내적 동기란 외부의 보상이나 평가가 아닌, 자기 내면에서 비롯된 행동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자기 결정 이론(Self-Determination Theory)을 제안한 데시와 라이언의 연구에 따르면, 내적 동기로 움직이는 사람일수록 외부 비교나 평가에 반응하는 정도가 현저히 낮습니다(출처: Self-Determination Theory).
저도 한때는 SNS에서 '좋아요' 수를 새벽에 확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게 제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고 있다는 걸,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챘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은 칭찬이 기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기쁘긴 한데, 그 기쁨이 자기 전체를 뒤흔들지 않는다는 게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미 자기 안에 판단 기준이 있어서, 외부 평가는 참고 정보 정도에 머무릅니다.
농구를 하다 부딪혀 넘어지면 보통은 그 자리에서 발끈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옷을 탁탁 털고 일어나 공을 다시 잡았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감각해 보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자기 개념 명료성(Self-Concept Clarity)이 높은 사람의 반응이었습니다. 자기 개념 명료성이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미지가 얼마나 뚜렷하고 일관되게 유지되는지를 나타내는 심리학 개념입니다. 이 수치가 높은 사람은 실수나 충돌 같은 외부 사건이 자기 정체성의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빠르게 털고 다시 집중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외부 칭찬과 비판을 정보로 받아들이되, 감정 진폭을 최소화한다
- 타인의 타임라인과 자신의 타임라인을 분리해서 바라본다
- 실수를 정체성의 위협이 아닌 단순한 사건으로 처리한다
- 거절을 이기심이 아닌 자기 경계 설정의 언어로 사용한다
- 혼자만의 시간을 결핍이 아닌 충전으로 인식한다
감정 조절은 억압이 아니라 처리 속도의 문제다
"저 사람은 화가 안 나는 거야"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해석이 가장 오해를 많이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 친구에게 '돌부처'나 '바늘로 찔러도 피 안 나올 놈' 같은 말이 따라붙었던 이유가 바로 이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우리 눈에 그 친구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직접 오랫동안 옆에서 봐왔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 친구도 화가 났고, 아팠고, 불편했습니다. 다만 그 감정이 올라오는 속도보다 처리되는 속도가 빨랐을 뿐입니다.
신경과학적으로 보면, 이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편도체(Amygdala)의 과잉 반응을 얼마나 잘 조절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전전두엽이란 이성적 판단과 충동 억제를 담당하는 뇌의 앞부분으로, 감정 반응의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하면 즉각 경보를 울리는 부위인데, 전전두엽이 이를 빠르게 평가하고 조율할수록 같은 자극에도 덜 흔들리게 됩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에 따르면, 이 전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조절 능력은 반복적인 경험과 인식의 훈련을 통해 변화할 수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감정 조절이 잘 되는 사람들이 꼭 어린 시절부터 안정적인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려본 경험이 많은 사람이, 흔들린 뒤에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체득하는 과정에서 단단해지는 경우를 더 많이 봤습니다. 그 친구도 그랬을 겁니다.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은 아픔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을 혼자 처리하는 방식이 이미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
자기 주장성(Assertiveness) 역시 감정 조절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기 주장성이란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타인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솔직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관계에서 덜 지치고 덜 불안하다는 연구 결과는, 이 개념을 통해 설명이 됩니다. 억지로 "네"를 반복하며 쌓인 불만이 어느 순간 터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지금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하는 쪽이 관계를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유지합니다. 제가 직접 이 방식을 써봤는데, 처음에는 관계가 어색해질 것 같아 두려웠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서로를 더 편하게 대하게 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타고나는 건가요, 만들어지는 건가요?
A. 타고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연구 결과는 다릅니다. 전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조절 능력은 반복된 경험과 인식 훈련을 통해 변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지켜본 그 친구도, 처음부터 평온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흔들림 속에서 스스로 단단해진 경우였습니다.
Q. 감정 표현을 안 하는 것과 감정 조절을 잘 하는 것, 어떻게 구별하나요?
A. 감정 표현을 억누르는 쪽은 장기적으로 내면에 불만이 쌓이고 어느 순간 폭발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반면 감정 조절이 잘 되는 사람은 감정을 인지하되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고, 필요할 때 자기 주장성을 통해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억압과 조절은 겉보기엔 비슷해 보여도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Q. 남과 비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의지로 비교를 끊으려 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자기 결정 이론에 따르면, 비교가 줄어드는 건 내적 동기가 강해질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남보다 잘 하고 싶다"는 방향에서 "내가 왜 이걸 하는가"라는 방향으로 질문 자체를 바꾸는 것이 현실적인 시작점입니다.
Q. 거절을 잘 못하는데, 이게 정서적 불안정과 관련이 있나요?
A. 연관이 있습니다. 자기 주장성이 낮을수록 불안 수준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거절을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관계가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인데, 실제로 경계가 명확한 관계가 더 오래 지속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거절하려 하기보다, 작은 상황부터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말하는 연습부터 시작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결론
그 친구가 어른이 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고, 남들이 난리를 쳐도 조용히 자기 일을 합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주변 사람들이 그걸 '감정 없음'이 아닌 '단단함'으로 읽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단순히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정서적 안정은 흔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흔들린 뒤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그 속도는 거창한 노력보다 작은 질문 하나에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내 기준인가, 남의 기준인가." 그 질문을 하루에 한 번만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방향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참고: "화가 안 나나?"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
https://www.youtube.com/watch?v=V35aOkz7rCM

